8·15광복은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되찾은 사건이다. 국권이 강탈된 후 민족독립운동이 가열차게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위한 모색과 진전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광복은 연합국 측의 승리에 힘입은 바가 컸고 냉전질서가 심화되면서 남과 북에 체재를 달리하는 단독 정부가 수립되어 민족이 분열되는 결과를 피할 수 없었다. 군국주의적 일제의 침탈로 국가 재건은 거의 폐허에서 시작되었고, 정치·문화적 침탈도 심각하여 일제 잔재 청산 노력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을 정도이다.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휴회에 들어가고 미·소간의 동서냉전이 고조되어가는 분위기 속에서 1946년 6월 3일 지방유세중에 있던 이승만이 정읍(井邑)에서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회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해야 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처음으로 단독정부수립을 시사하였다.
이승만은 귀경 즉시 72개 단체를 통합하여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만들고 자신은 총재로 앉고 김구를 부총재로 앉혔다. 이에 대처해서 미군정청으로서도 좌우합작노선을 추진하면서 입법의원을 출현시키려고 하였다.
입법의원은 미군정청으로부터 어느 정도까지 입법권과 인사권을 이양받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승만은 여기에 기대를 걸고 있던 차 12월 4일부터 1947년 9월 21일까지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면서 귀국환영대회에서, 미국정책은 공산주의와의 합작을 단념했고, 따라서 남한과도정부를 수립해야 하며 이 일은 미군정과 협의해서 하면 되는 일이므로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사실상 그의 미국여행기간중인 1947년 3월 12일 트루먼독트린이 발표되어 동서냉전이 본격화되고 있었다. 이 연설을 계기로 이승만과 김구는 결정적으로 결별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특이한 사실은 공산당과 이승만 노선은 미·소의 동서대립이라는 국제관계 속에서 한국인의 전통적인 정치규범의식(민족주의적 가치관)이 억제되고 외부지향적 정치노선이 새로운 시대의 공식적 정치규범이 되게 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승만 노선은 확실히 현실적 국제감각에 입각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38선 이북에서의 급속한 소비에트화 진행이 그것의 불가피성을 뒷받침해 주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미국은 이미 유회된 미소공동위원회에서는 한국문제를 다룰 수 있는 한계점에 도달하였다는 인식하에 한국문제를 미·영·중·소 4개국 외상회의에 넘겨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38선 이북에서 확고한 정권기초를 마련한 소련은 4개국 외상회의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미국은 한국인의 독립염원을 감안하여 1947년 8월 17일 제2차 유엔총회에서 유엔한국위원단 감시하의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제의하고, 정부가 수립되면 미·소 양군은 철수하고 그 정부의 권능을 인정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미국안이 가결되고 유엔한국위원단이 내한하여 총선거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소련측이 유엔한국위원단의 북한 입경(入境)을 거절하여 부득이 남한만의 선거가 불가피하게 됨으로써 이승만의 주장대로 정세가 돌아갔다. 이 선거가 1948년 5월 10일에 실시되었다. 이 5·10선거는 대한민국정부 수립의 기초조건이 되었다. 7월 17일에는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이 선출되었다.
이로써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게 국권을 상실한 이후 38년만에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다. 정부수립 후 정부는 미군정으로부터 정권을 이양받아 세계 여러 나라에 정부수립을 공식 통고하고 외교활동을 개시하였다.
그 해 12월 12일 파리에서 개최된 유엔총회에서 48 : 6이라는 절대다수의 지지로 대한민국이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승인을 받았다. 그 뒤 추가승인국은 증가일로에 있었다.
그러나 38선 이북에서의 정권수립 과정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진행되었다. 소련군은 제2차세계대전 직후의 동유럽 여러 나라들의 위성국가화 모델에 따라서 38선 이북지대를 소비에트화할 의지를 확고하게 가지고 임하였다.
소련군은 소련에 거주하고 있던 일단의 한인 공산주의자들과 같이 이북에 진주하였다. 약 300명으로 알려지고 있는 이들 한인부대는 김일성(金日成)이 지도하고 있었다.
이 부대는 광복후 북한 지배구조의 원천적 핵심체였다. 그 뒤 중국에서 돌아온 연안파(延安派)도 여기에 합세하였다. 이와 같이 소련 점령군의 절대적 후원과 지시에 따라 귀국한 공산주의 집단이 북한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토착공산주의세력이 지배에 참여하는 것은 처음부터 차단되었다.
소비에트식 정권형태의 핵심은 공산당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거니와, 이미 서울을 중심으로 한 공산당 세력이 남한